격동의 시대, 한국을 바로잡은 이 시대의 위인
“저들을 잡아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

▲ 교황 요한바오로 2세와 함께

떠나간 사람의 빈 자리는 크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의 빈자리는 유난히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2월 16일, 반세기 동안 한국의 변동을 지켜보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했던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 어름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8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각종 포털사이트에는 그의 선종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추도 카페가 줄지어 열리는 등 사회적으로도 그의 선종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국내 가톨릭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 군사의 힘으로 자유 민주주주의 인사들을 거침없이 잡아들이던 군사정권에는 과감한 쓴소리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한동안, 아니 영원히 그가 남긴 따뜻한 마음과 올곧은 정신은 후대에 깊이 아로새겨져 남아 있을 듯하다.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김희준 기자 juderow9@

▲ 경북 생가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시 남산동에서 부친 김영석과 모친 서중화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이었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던 것. 유아세례를 받은 그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소년으로 성장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던 19세기, 그의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된다. 갖은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조부 김보현은 결국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하게 된다.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돼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부친 김영석을 임신하고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나 그의 부친을 낳을 수 있었다.

그에게 등불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해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 김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다가 혼인 후 대구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구한말에서 일제까지 이어지게 되고 이에 부친 김영석은 한 장소에서 옹기점이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장사를 했다. 하지만 잦은 이주는 살림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 뿐이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함께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나이 5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것을 떠돌며 자란 탓인지는 몰라도 김수환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종교계에 몸담는 것이 아닌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그의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살펴보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는 해에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어릴 적 소원대로 장사꾼이 되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그의 부모는 직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장사꾼이 되려는 꿈을 곧 접어야 했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부모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넷째 아들 김동환과 막내 아들 김수환이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모친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을 등에 업고 그의 형 김동환과 김수환 추기경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 김영석이 세상을 떠나자 김수환 추기경의 집안은 다시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모친은 “집안일은 신경쓰지 말고 너와 형은 오직 공부에 매진해 성직자의 길로 가라”고 설득했고 그러한 어머니의 열성과 깊은 신앙에 감동한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한국 최초의 추기경,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될 수 있었던 것.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 사회의 등불이었다면 그에게 등불은 바로 어머니였다.

▲ 음성꽃동네 방문

성직자가 되기 위해 헤쳐갔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 추기경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학교는 일반 상업학교인 갑조(甲組)와 소신학교 과정인 을조(乙組)로 나뉘어 운영되는 학교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와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1920~1988) 주교 등과 함께 을조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을 향해 가기로 했지만 처음에는 사제의 길이 그에게 확고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장사꾼에 대한 선망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꾀를 부려보기도 했으며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에는 사소한 죄, 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른바 ‘세심병’까지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 담당 신부를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담당신부는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심하게 그를 꾸짖었고 그의 방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또한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제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일기장에 적어 남길 정도로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 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은 ‘황국 신민이 아니기 때문에 적을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까지 맞게 된다. 교장 선생은 그가 버릇이 없다며 뺨을 때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 놈 괜찮은 녀석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이에 교장 선생은 후에 그가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는데, 그 교장 선생은 바로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청년 김수환은 그때까지만 해도 성직자의 길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1944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도쿄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전쟁에 징집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게 되고 무모한 탈출까지 감행하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듬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상지대학에 다시 복학해 학업을 끝까지 마치고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게 된다. 이듬해 서울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사제에 서품된 김수환 추기경은 이제 본격적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의 미사모습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에 있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과연 한 평생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며 그 당시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비록 어머니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소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29살에 사제품을 받고 경북 안동본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 본당)의 주임신부로 성직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 장애인과 함께하는 사랑의 밤 행사에서

성직자로서 첫 발을 내딛은 후,
한국 최초,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기까지…
첫 부임지였던 안동본당과 그곳의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유난히 애틋한 기억으로 남았던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살아 생전에도 그 곳을 자주 회고하며 그 당시의 애틋한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고. 당시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가진 돈을 털어 나눠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후 김천본당 근무를 포함해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고 보람되었다고 김수환 추기경을 밝히곤 했다. 안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주임 겸 성의중고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년 남짓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은 웃을 때 코가 벌름거린다고 해서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교장 선생이었지만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의 격을 허물고 지내다 보니 학생들은 그를 교장 선생님이라기보다는 편한 이웃집 아저씨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런 별명이 붙지 않았나 싶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뮌스터 대학에 적을 두게 된 그는 7년 동안 그곳에 체류하게 되고 그 당시 만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면 이념논쟁 등으로 요동쳤던 7,80년대 한국사회를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후에 말한 바 있다. 독일 유학 시절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시대에 걸맞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쇄신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면서 “독일에서 겪은 그런 체험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깨달음도 잠시, 그는 자신이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사들은 고해성사와 미사를 부탁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만 있으면 그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기 일쑤였다. “제발 도와 달라”는 동포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 때문에 학업에 큰 지장이 생겼고,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논문주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던 그는 결국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가톨식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면서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지던 중, 1966년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그러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의 막내인 그에게 당시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대 교구는 무겁게 부담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찌 됐건 갑작스럽게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현대사의 한복판이 됐던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사회의 격동적인 휘말림을 몸소 겪어야 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세상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그는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47세. 전세계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된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 테레사 수녀와 함께

격동의 7,80년대를 겪으면서…
“저들을 잡아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 명언 남겨
한국 최초 추기경, 임명된 추기경 중 최연소 추기경이라는 영광 속에서 누리던 기쁨은 곧 접어야 했다. 격동의 70년대와 80년대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모두 돌보는 일이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그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을 통해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 정의 운동 한가운데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회고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겪었던 고초가 피부로 잘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회고록에서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내해야 했고, 그때의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게 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에서 갈등도 점차 깊어지게 되고, 1974년에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옥살이를 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장기집권으로 향해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라 불렸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보루였다.

▲ 노기남 대주교와 인사를 나누며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려던 경찰 병력의 투입을 끝까지 막아냈다. “저들을 잡아가려거든 나를 밟고, 나를 밟은 후에는 내 뒤에 신부들을 밟고, 신부들을 밟거든 그 뒤의 수녀들을 밟은 후 잡아가라”고 경찰들을 향해 외쳤던 김수환 추기경의 이 말은 유명하다. 지금까지도 이 말은 인구에 회자되며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명언으로 남아있다. 경찰은 그러한 김수환 추기경을 밟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던 경찰 병력은 철수했고, 명동성당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이들은 지금까지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 병력 투입과 학생 연행은 상징적으로 시국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에 앞서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그는 미사 강론을 통해 “이 나라가 과연 양심이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총칼뿐인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는 과감한 비판을 던지기도 했다. 이처럼 살얼음판 같던 시대를 헤쳐오면서 얻게 된 불면증은 김수환 추기경을 30년 넘게 괴롭혀왔다. 그 어려웠던 시기, 김수환 추기경의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에 깊이 개입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7,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라던지,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다”고 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같은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굵직한 행사들을 여럿 치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 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준 행사들이다.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민주화가 꽃을 피운 90년대에 이르러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종교인이자 사회지도자로서 시대의 한복판에 섰던 그는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히게 된다. 하지만 사임은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임 의사를 밝힌 지 6년 만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고, 우리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온 김수환 추기경은 시대의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놓고 지난 2월 16일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떠났다.

▲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에서

이명박 대통령, “그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
소외 계층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47세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었다. 가난한 시골소년이 신학교를 다니고, 시골 성당의 신부를 거쳐 추기경이 되기까지 과정은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 부분이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추기경이라는 직함을 달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끊임없이 내적 고뇌를 통한 성찰을 수행해왔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에게 가르쳐 준 가톨릭교회의 쇄신 정신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47세의 젊은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를 맞은 우리는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는 믿음을 온 몸으로 실천한 김수환 추기경. 추기경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정치권력의 공작은 끊임없이 있어왔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조차 크고 작은 반발이 있어 왔지만 정치적 의도나 목적이 없이 오직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선 김수환 추기경의 신념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종 소식을 접한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그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 당시 얼마나 탄압과 압박에 시달렸으면 몇 십 년간 불면증에 시달려 왔을까?

“추기경님이 꼭 살려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받아야 했고,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꼭 해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 어느 한 정치사형수의 아내

“고향의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에게 기대서 울듯이, 그냥 그분에게 기대 실컷 울었습니다.”
- 어느 방직공장의 노조위원장

7,80년대 해고노동자, 철거민, 정치사형수 등 이 사회의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피난처는 바로 명동성당이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늘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있어 피난처이자 안락한 집이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안겨 울 수 있는 아버지이자 기댈 수 있는 십자가 같은 존재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라”고 말해주었고, 그들이 울면 같이 울면서 또 한번 안아주었다. 그 기억마저 아스라해질 법한 지금, 아직도 그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추기경이 빌려주었던 작지만 듬직한 어깨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선종 직전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던 그에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분신이자, 풀어야 할 숙제였다. 정치인이나 높은 사람들은 주로 그를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찾아갔다. 추기경이 되고 난 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인간에 대한 애정, 즉 인권과 노동자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관심의 출발은 인간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민주화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도 그가 정치적 의도나 목적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인간과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바로 그것뿐이었다. 특히 소외 계층에 대해서는 직접 함께하지 못함에 대해 항상 미안해했고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를 드렸다. 고난희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회된 사람들의 십자가이자,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였다. 한국 가톨릭의 위상을 드높이고,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김수환 추기경.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족적과 발자취를 따라가며 다음 세대를 위해 그의 가르침을 깊이 아로새길 차례이다.

한국 사회가 격동의 시기를 극복하고 현재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리 국민들의 부단한 노력이었지만, 그 뒤에서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큰 몫을 해냈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선종 이후, 그를 찾는 참배객들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만 봐도 그가 남긴 희망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한국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가슴이 아플 것이고 그를 기리는 글, 메시지, 언론매체의 보도가 계속될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일시적인 기억으로 끝날 인물이 아님을 말해두고 싶다. 한국사회가 이만큼 클 수 있었던 바탕에 그가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