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 3대 세습자인 김정은(28)이 1만여 북한군의 사열을 받으며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데뷔하던 날, 비운의 망명객인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자택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1997년 4월에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했다”며 한국으로 망명 온 지 13년만이다. 그는 “모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000만 우리 민족의 생사 운명과 바꿀 수 없다. 유일한 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 밖에 없음을 확신해 대한민국으로 왔다”고 했다. 자신의 가족에게 가해질 비극보다는 김정일 체제를 타도하고, 독재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를 구출해야겠다는 민족적 일념이 앞섰기 때문이다.

▲ 유영옥교수

황 선생의 용기와 통일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여 우리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황 선생님께서 북한의 실상을 국민과 세계에 정확히 알려줌으로써 국가 안보태세 확립에 확실하게 공헌하신 바가 크며,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고 훈장 추서 배경을 설명했다.
  고 황장엽 전 비서의 탈북은 남한 주사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주체사상 대부(代父)의 망명으로 상당수 주사파들이 사상적으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수많은 강연과 기고를 통해 북한 수령 체제의 허구성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증언했다. 세계와 한국인들에게 북한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북한의 최고위 탈북자로서 남한 내 북한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탈북하기 전 김일성과 김정일 등 북한 최고지도층들과 나눈 대화와 개인적인 경험은 가장 권위 있는 북한정보로 남한 연구자들의 연구에 활용됐다.

황 선생은 북한 정권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수령의 개인 독재를 절대화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장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독재체제”라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남한에게 불리한 것은 자연재해까지 포함하여 다 좋아하고, 오직 남한을 망하게 하는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한의 일부 세력이 북한 정권에 대해 환상을 갖는데 대해서는 “가까이 있는 북한인민들을 살육하고 굶겨 죽이는 김정일에게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한 동포들에 대한 민족애를 기대할 수 있는가?”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 북한 통치 집단이 모든 권력과 재력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북한 정권을 안일하게 보는 한국 사회의 각성도 촉구했다. 늘 북한보다 한국을 더 걱정하고 우려했다. “남한이 정신 못 차려서 큰일났다. 망하는 북한을 보며 대한민국과 통일을 논하러 왔는데 남한이 더 걱정된다. 김정일보다 더 한심하고 못된 놈들이 대한민국에 많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의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으로 황 선생은 많은 실향민과 탈북자들에게 희망을 줬다. 그들이 외롭고 힘들 때마다 북녘 땅에 두고 온 삶의 발자취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대부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단체를 만들고 지도했다. 많은 탈북자단체가 거의 사망을 아쉬워하며 5일 간의 ‘통일 사회장’으로 하게 된 동기다.
  남한에 망명한 이후 황 선생은 북한 공산주의 독재통치의 잔학상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2000만 북한 동포를 구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겨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세상이 모두 편한 길을 바라볼 때 그는 험하고 힘든 길을 걸어갔다. 다른 이들이 권력과 부와 안일을 추구할 때도, 그는 고독과 가난과 멸시를 선택한 어리석은 노인이었다. 나이 80에 이르러서 세상에 대한 욕망을 거둘 때가 됐음에도 그는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한 열정으로 살았다. 그런 그를 김정일은 가혹한 ‘피의 복수’로 단죄했다. 황 전 비서의 직계 가족뿐 아니라 공·사적(公·私的)으로 관련을 맺었던 2000여명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황 선생만큼 북한 체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증언이 언제나 경청됐던 것은 아니다. 좌파정권 아래서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공공연히 부정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이 끝나기까지의 지난 10년 동안 황 전 비서는 사실상의 출국금지와 가택 연금 상태에 처했다. 북한 실상 증언과 김정일 체제 비판 활동에 재갈을 물리는 제약이 가해졌고, 심지어는 북한의 김정일이 보낸 암살자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노(老) 망명객에게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은 자신에게 남아있던 생의 대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의 싹이 뿌리째 뽑히는 것을 지켜봐야한 하는 절망의 기간이었다.

황 선생은 김정일 정권뿐 아니라 남한의 친북 좌파와 종북(從北)세력을 공동체의 적으로 보았다. 그는 최근에 기고한 글에서 “죽은 민족반역자들에게는 후손까지 내력을 캐는 사람들이 어째서 산 반역자(김정일)의 민족 반역행위는 보고도 못 본 척하는가?”라고 국내 친북(親北) 세력들을 질책했다. “김정일은 나라를 도둑질한 최악의 도적놈이다. 지금 그는 도적의 지위를 3대째 물려주기 위하여 철부지(김정은)에게 대장 감투를 씌워놓고 만세를 부르라며 인민들을 우롱하고 민족을 망신시키며 세계 인민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자기의 비겁성과 허위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김정일과 타협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국민들을 기만하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결코 어둠을 밝힐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가 분노했던 한심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권력 3대 세습을 두둔하는 우리 사회 종북주의자들의 망언은 그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좌파 정권의 시대가 끝나고,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에 본격적인 활동의 길이 열리자 그는 과거를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정신력 하나로 촌각을 아끼며 국내외를 다녔다.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생명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한의 폭정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한 우리가 부끄럽다.
  그가 남들처럼 이기적인 세속에 젖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했더라면 그는 북한에서 말년에 부귀영화를 누렸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편안한 안일의 길보다 험난한 고난의 길을 자초했다. 북한의 김정일 세습 독재정권뿐만 아니라 남한의 종북세력들의 위선과 거짓과도 싸워 온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황 선생이야 말로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다.  

북한이 개발하는 미사일과 핵무기와 대남 적대정책은 우리의 대북정책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필요성에서 출발한다.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과 선의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기대는 망상일 뿐이다. 북한의 독재 집단이 핵무기로 남한을 위협하는데도 북한을 찾아가 천문학적인 달러까지 주면서 평화를 구걸한 행위는 북한 정권의 수명과 주민들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또한 “앞으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단언하여 국민의 안보의식을 무장 해제시킨 행위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국민에 대한 위선이었다. 북한 정권의 실체를 외면한 채, 사실을 인정치 않고 의도적으로 부정한 세력들은 김정일과 함께 역사 앞에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황 선생은 생전에 그토록 염원하던 김정일 독재 세습 폭정체제의 종말과 남북이 하나 된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여 준 불멸의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민족사에 길이 남아 통일의 대장정에 등불이 될 것이다. 그는 팔순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권 탄압 국가인 북한 체제에 항거하고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희생까지 마다하지 않은 남북 분단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비록 비운의 망명자로 이승을 떠났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친 통일의 상징으로 영생할 것이다.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노력해야 한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황장엽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