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 조질토기(粗質土器)와 함께 한국 도자기의 서막을 알렸던 흑유도기(黑釉陶器)가 있다. 그 후 흑유자기(黑釉磁器)로 고려·조선 초까지 발전하나 흑유자기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몇백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잊혀져가던 한국의 전통 흑유를 계승,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도예가가 있다.

차성경 기자 biblecar@

광주 왕실 도자기 명장 연파 신현철 도예가의 행보가 화제다. 도공의 길을 걸어오며 늘 우리의 전통을 전승하되 이를 기반으로 나만의 것을 창작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온 신현철 도예가는 스스로가 그러한 작품 활동을 펼쳐 왔다. 그간 신 도예가는 한국 도자기를 대표하는 청자와 백자의 유약 재현과 다양한 기물의 재현하고 제작하려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그 중에서도 다른 도자기들에 비해 크게 주목 받지 않았던 흑유자기의 명맥을 잊고자 노력해왔다.

▲ 신현철 도예가

천년 동안 우리의 삶에 스며든 그릇, 흑자(黑磁)
흔히 도자기라고 하면 그 시대에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한 고려청자와 순백의 미로 정평이 나 있는 조선백자를 떠올린다. 청자는 고려, 백자는 조선의 대표적인 그릇이기에 이러한 인식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 연파 신현철 도예가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청자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의 삶에 스며든 그릇이 흑유도자기 즉, 흑자(黑磁)다”고 강조한다. ‘검은색[黑] 유약을 입힌 자기인 흑자는 태토가 동시대에 생산된 분청사기나 백자와 유사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연과학적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흑색 계열의 어두운 색조를 보이는 그릇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흑자의 유약에는 착색제인 산화철(Fe2O3)이 대략 7∼8% 정도 함유되어 있어 유색이 검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오주서종(五洲書種)에 오자의 유색은 검기도 하고 누런빛을 띠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흑자의 유색은 대체로 검은색에 가까우나 황색까지 포함하는 그릇으로 이해한 듯하다. 실제 조선 후기에 흑자를 중점적으로 생산한 시설인 포천 길명리 요지와 가평 하판리 요지는 황색·담갈색·흑갈색·흑색 도편이 출토되어 문헌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경기도자박물관은 “이로 인해 조선시대는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자(烏瓷)·오자기(烏磁器) 등으로 불렸다”며 “현재 사용되고 있는 흑자라는 명칭은 20세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981∼1931)가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에 언급한 칠긔그릇[칠기그릇]과 셕간쥬사긔[석간주사기] 역시 흑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부연했다.

고려시대의 흑유자기
흑자는 고려 초기 청자와 함께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흑자는 시간상으로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공간적으로는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전국에 걸쳐 생산되었다. 고려 초기 대표적인 흑자 생산 요지는 황해도 배천 원산리 요지와 경기도 시흥 방산동 요지, 용인 서리 고려 백자 요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 일대와 전라도 일대의 요지에서도 흑자가 생산되었다. 신 도예가는 “특히 해남 신덕리 요지와 고흥 운대리 요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일대의 요지는 이전과 비교하여 다양한 기종의 흑자를 구웠고, 전체적인 생산 비율도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면서 “이는 전라남도 일대가 중서부 지역보다 흑자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흑자의 태토는 요지에 따라 도기 태토를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 태토를 이용하기도 했다.

▲ 연지

전라도는 도기 제작 전통이 강한 곳으로 흑자 또한 도기 제작 기술의 영향을 받았다. 흑자는 병이나 호 등 저장 용기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흑자의 수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중기는 흑자와 관련해서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 고려 개경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보고 들을 것을 정리한 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록된 ‘금화오잔(金花烏盞)’이 주목되고 있다. ‘금화오잔’은 ‘금으로 무늬를 그려 넣은 검은색 잔’으로 흑자를 지칭한다. 이를 보면 12세기 초에는 금으로 무늬를 그려 넣은 흑자가 있을 정도로 흑자에 대한 소비층의 인식이 변화되었다. 이 시기는 초기에 비해 흑자를 만드는 요지는 감소하였으나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을 중심으로 양질의 흑자가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족배·매병·승반·기대·장고 등 새로운 기종도 만들어졌다. 흑자의 기형과 태토는 동 시기에 제작된 청자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신현철 도예가는 “고려 후기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요지에서 청자와 함께 소량의 흑자가 출토되어 흑자 제작 전통이 고려 말을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며 “다만, 고려 후기 흑자의 제작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자료가 축적되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조선시대, 근현대시기의 흑유자기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비해 흑자의 소비가 증가했다. 흑자는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분청사기 또는 백자와 함께 소량 생산되었다. 분청사기나 백자와 동일한 태토에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시유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가평 하판리 3호 요지나 포천 길명리 요지, 그리고 파주 설마리 요지 등 흑자를 중심적으로 생산한 가마가 운영되어 조선 후기 흑자 수요에 일정한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초기∼중기는 요지가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다수 분포되어 있다. 조선 후기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신 도예가는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흑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꾸준하게 제작되었으며, 후기에 이르면 경기도 일대에 집중되는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강원도 지역의 경우 아직 흑자 요지가 발굴 조사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주 비두리 요지와 철원 문혜리 요지에서 흑자가 수습되어 강원도에서도 흑자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오자가 남중(南中)과 관동(關東)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오자토가 관동 철원부에서 나온다고 기록하여 주목되고 있다. 흑자는 조선시대에도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꾸준하게 생산되었다.

▲ 연밥찻상

신현철 도예가는 “조선시대 생산된 흑자의 기종은 병과 호, 그리고 뚜껑 등 고려시대와 유사하게 저장용기가 중심이 되었다. 액체를 따르기 위해 주구가 있는 발과 호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일부이긴 하지만 발과 접시, 잔 등 일상생활기명도 확인되고 있다”면서 “청남도 계룡시 유동리에서 조사된 회곽묘에서 11점, 충청남도 연기군 장재리에서 보고된 토광묘에서 1점의 흑자 명기가 출토되어 흑자가 무덤의 부장품으로도 활용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에도 흑자의 전통은 유지되었다. 특히 도자의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조선인들은 흑자를 백화점 등에서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대표적으로 남만주철도회사(1906년 설립)의 로고가 있는 흑자 접시는 관광산업과 연계하여 제작된 기념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흑자는 아사카와 다쿠미가 언급한 ‘칠기’로 불렸는데, 이는 흑자가 옻칠한 목기처럼 짙은 흑색으로 광택을 띠었기 때문이다. 한편, 근·현대 경기도 이천은 흑자 생산지로 부상했다. 흑자는 근·현대 이천의 도자 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천에서 제작된 흑자는 ‘이천’이라는 지명에 ‘칠기’라는 명칭이 더해져 ‘이천 칠기’로 불리고 있다. 이천 칠기의 기종은 주로 항아리와 병이었다. 재유를 입혀 재벌 하였다는 점에서 약토(藥土)나 광명단을 사용하는 옹기와 차이가 있습니다. 이현승은 1930년대 이전부터 이천에서 칠기 요장을 운영하였고, 현재에도 대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천 칠기와 관련하여 1949년에 초축되고, 1962년에 개축된 이천 수광리 가마(국가 등록문화재)가 남아 있다.

흑자의 명맥 잇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 기울여
신현철 도예가는 “흑유자기는 그 발색에 있어서는 물론 여러 면에서 청자와 백자와는 다른 면면을 지니고 있어 주목되어야 하는 전통 도자기의 한 분야”라며 “그간 학계에서 조사한 바로는 현재 전국적으로 41곳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어 생산과 공급이 이루어졌고, 실생활에서도 활발히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흑유자기는 전국적으로 41곳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고, 이 중 경기도에는 14곳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포천 화대리·길명리·유동리·도평리, 가평 하판리, 용인 서리·신봉·묵리·자곡리, 연천 도산리와 고등리, 양주 교현리에서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들을 보면 주로 경기 북부와 용인지역으로 구분되는데, 광주 역시 용인과 인접해 있어 향후 흑유자기 유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현철 도예가는 비록 도자기를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흑유자기에 관심을 갖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다양한 태토의 사용과 유약의 개발 및 계량에 주력해왔다. 이를 위해 가마와 연구소 설립 이후 광주군에 산재해 있는 많은 도요지를 답사했고, 실제 흑유자기가 출토된 길명리 유적의 발굴현장을 답사해 실물을 견학하는 등 노력을 경주해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현철 도예가는 자신만의 흑유자가 유약을 개발 할 수 있었고, 또한 다구를 비롯한 다양한 흑유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가마터의 조사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실제 생활에 이용된 실용기였음을 볼 때 그가 제작한 흑유 생활자기 역시 이에 비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뿐만 아니라 길명리 유적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생산품이 발, 대접, 종자, 잔, 접시, 병, 향, 합, 편구발, 뚜껑, 제기류 등 다양한 생활용기류를 망라하는 것은 신 도예가가 추구하고 제작하는 흑유자기의 방향성과 일치한다. 그간 신현철 도예가는 세간에 주로 차 다구를 만드는 도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가 생산한 흑유자기는 달항아리를 비롯해 병과 향로, 각종 생활자기에 이르기까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전체 품목을 아우르고 있다. 특히 청자로부터 백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어온 연화문을 흑유자기에 접목하여 작품을 창안하기도 했다. 또한 단순히 어두운 색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다양한 발색을 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신현철 도예가는 “제가 처음 흑유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작품 제작에 매달리던 시절에는 흑유자기에 대한 주목도가 낮았다”며 “현재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학문적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흑유자기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작품의 제작이 필요한 때다”고 피력했다. 그는 “고려시대로부터 만들기 시작한 흑자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 전통 도자의 한 분야다. 청자와 함께 시작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까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여 왔다”면서 “비록 청자와 백자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나 저장 용기 등의 목적으로 꾸준하게 생산·소비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근 흑자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고, 박물관 전시를 통해 일반인들이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하여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한국 도자사의 완성과 장르를 넓힌다는 관점에서 청자나 백자에 비해 관심 받지 못하고 있는 흑자에 대한 깊은 연구와 관심이 요망되는 시점이다”고 관심을 촉구했다. NM